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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읽기 ]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분서갱유

my jeje 2022. 12. 25.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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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도 돌아온 고사성어 알아보기 시간입니다.
분서갱유에 대해 같이 보도록 해요.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뜻
책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파묻는다는 뜻
사상의 탄압.






분서갱유의 유래
춘추전국시대 진시황제 때의 일로,
기원전 213년과 기원전 212년에 일어난 별개의 두 사건을 하나로 합쳐서 일컫는다.
실용서를 제외한 사상서를 불태우고 유학자를 생매장한 탄압책이다. 진시황은 이전까지는 중국 대륙의 혼란을 종식시킨
유능한 군주였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폭군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진시황 시대 분서갱유, 즉 전국적인 사상 탄압의 단초가 되었다고 평가받는 사건은
기원전 213년 함양 연회에서 일어났다.
'옛 사상과 제도에 매달려 있다면 통치에 해로울 것'이라는 주장 아래
의약 · 점술 · 농업 등의 책을 제외한 제자백가의 책들과 시, 서, 진을 제외한 국가들의 역사서를 불태운다.
이것이 분서 사건이다. 1년 뒤 후생(侯生)과 노생(虜生) 등이 진시황의 불로초에 대해 비난하는 사건이 생긴다.
이를 발단으로 전국의 불온 사상가 460여 명이 함양에 매장되었고, 갱유로 불리게 된다.
갱유에 대해서는 사실이 분명하지 않아,
한나라 건국 후 과거를 부정하기 위해 과장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사실관계는 차치하고 보면 분서와 갱유는 거대한 통일제국 유지를 위해 봉건제에서 중앙집권제로 발돋움한 진시황이
지역적 관행을 뛰어넘는 사상이 필요했기에,
유가를 탄압하면서 저지른 사건이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많았던 한자를 통일했고,
도량형을 표준화했으며,
법가사상에 기초해 생활을 규제하는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유지하려고 했다.

결과적으로는 유학이 일시적으로 크게 위축된다.
진의 멸망 이후 고대의 경전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활발했고,
한나라 초기에는 시경, 서경, 예기, 춘추 4 경이 전부 복원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기억과 기록 간에 갭이 생겼기에,
이를 논리화하는 훈고학이 성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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